사대문

동대문모아 0 558 2017.03.23 14:20
조선시대 도성(都城)인 서울 성곽의 4개의 큰 성문. 정동(正東)의 흥인문(興仁門, 속칭 동대문), 정서의 돈의문(敦義門, 속칭 서대문), 정남의 숭례문(崇禮門, 속칭 남대문), 정북의 숙청문(肅淸門)을 전체적으로 이르는 명칭이다.

흥인문은 태조 때 도성을 수축하면서 건설되었는데, 1396년(태조 5) 1차 축성 때 경상도 안동과 성주 사람들이 동원되어 동대문 일대의 축성 공사를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이듬해 4월에 완공되었다. 이어 1451년(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1869년(고종 6) 개축하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之’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동대문의 층루(層樓) 목조 건물은 이때 새로 지은 것인데, 조선왕조 말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물로 건축양식의 시대적 변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완하고자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돈의문의 현판은 창덕궁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글씨는 조일회(曺一會)가 쓴 것으로 전하는데, 최근에는 그의 재종손 조윤덕(曺潤德)의 썼다고도 한다.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산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를 따랐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대문모아 0 558 2017.03.2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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